왜 ‘지사’가 아닌 데브기어인가

아시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저는 2001년부터 볼랜드코리아에 들락거리며 많은 제안과 조언들을 했었습니다. 줄잡아 대략 30여 가지를 제안했었는데, 몇몇 가지는 실행된 것들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었습니다.

그 근본적인 한계란, 장기적으로 가야할 정책들이 항상 1회성으로 시행되고는 중단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개발툴이라는 성격상, 주로 단기 영업보다는 장기 마케팅에 승부가 갈리는데, 장기적으로 시행되어야 할 정책들이 단 한번 시행되고는 중단된 것이 여럿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2002년 여름에 대학 교수님들을 대상으로 전국 투어 세미나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전 C++Builder 교육을 담당했고, Delphi는 주만호님이 했었죠. 이 투어 세미나의 목적은, Delphi/C++Builder/Kylix/JBuilder를 홍보해서 대학들의 정규 교육 과정에 넣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아주 많은 교수님들로부터 C++Builder에 대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었고, Delphi 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이 교수 대상 투어 세미나는 매년 여름/겨울 방학마다 반복해서 계속 할 예정으로 기획된 것이었고, 그래서 저도 몇년 정도 지나면 꽤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많은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1년에 두차례씩 매년 반복하기로 했었던 이 투어 세미나가, 2002년 여름에 한차례 시행해본 것을 끝으로 불과 1회로 끝나버렸습니다. 볼랜드코리아 내부의 사정이 있었기도 하지만, 그렇게 한 번 하고 말 것이었으면 차라리 아예 안하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건이 그 외에도 여러 건들이 있었습니다. 1년이 넘어가며 계속 시행된 정책은 하나도 없었죠. 그 시도들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계속되기만 했다면 꽤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만한 것이었는데도, 다국적 기업의 소규모 지사의 특성상 거의 오로지 단기 영업 실적만을 따지는 분위기가 너무나 강했습니다. 월단위 영업 실적, 분기 단위 실적, 연 단위 실적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 바로 접어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다국적 기업의 소규모 지사의 운명입니다.

개발툴들이 볼랜드에서 코드기어로 모두 넘어온 이후에도, 기존의 볼랜드코리아와 별개로 코드기어의 지사가 설립되기는 했습니다만, 오히려 사업 영역이 적어지는 바람에 볼랜드코리아보다도 더 작은 규모로 줄어들었죠. 단기 영업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바꾸려면 장기 마케팅을 해야 하는데, 소규모 지사의 현실에서는 단기 영업밖에 할 수 없다… 사실 국내의 Delphi/C++Builder 개발자 수는 세계적으로 봐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아시다시피 불법복제율이 너무나 높아서 매출은 개발자 규모에 비해 턱도 없이 적고, 그러니 지사가 소규모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로, 코드기어 한국 지사에서는 작년 봄 정도부터 코드기어 본사, 그리고 뒤이어 코드기어를 인수한 엠바카데로 본사와 계속 진지하게 협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말 정도에 그 결론으로 본사와 지사가 합의한 것이, 본사의 글로벌 정책의 제한을 강하게 받는 지사 형식이 아닌, 독립 회사이면서 한국 시장의 특성과 현실에 맞춘 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독립 회사를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는 안이었습니다. 독립 회사이기는 해도, 본사와의 기술적 교류 등 대우에 있어서는 기존의 지사와 동등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데브기어입니다. 기존의 코드기어 한국 지사를 그대로 순수 한국 자본의 회사로 탈바꿈하고, 이름을 데브기어로 바꾸고 새로 출범한 것입니다.

데브기어는 엠바카데로/코드기어이면서도 동시에 엠바카데로/코드기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지사로서 필요한 권한과 법적 위치는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한국 시장에 맞는 독자적인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자율권을 얻었습니다. 이 자율권이야말로 한국내에서 제대로 된 기술 및 제품 정책을 펼치기 위해 근본적으로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었죠? 이것이 제가 바로 오랜 망설임 끝에 데브기어에 합류한 가장 큰 배경입니다. 저한테는 수많은 아이디어와 충분하고도 넘칠 열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소규모 지사 시스템에서는 앞에서도 말했던 근본적인 한계, 즉 장기적인 기술 마케팅이 불가능하다는 현실 때문에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와 열정이 있더라도 좌절되었던 거죠. 하지만 이젠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한번 비젼을 펼쳐볼 수 있는 토양이 된 거죠.

물론 토양이 충분히 좋다고 해도, 비바람을 이겨내고 충분한 햇볕을 확보해야 하고 수맥에 뿌리를 뻗어야 하고 등등 수많은 난관들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바윗돌에 떨어진 꽃씨는 아무리 애를 써도 말라죽을 뿐이지만 비옥한 흙에 안착한 꽃씨는 스스로 노력하여 마침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죠.

자, 그럼 저는 오늘도 또 하나의 싹을 흙 위로 밀어올리기 위해 또 달려보겠습니다. ^^

3 comments for “왜 ‘지사’가 아닌 데브기어인가

    • 먼저, BDTG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말씀드리면…
      BDTG는 볼랜드로부터 개발툴 그룹이 분리되기로 결정된 후, 코드기어(CodeGear)로 이름이 정해지기 전까지의 공식 이름입니다. BDTG 자체가 ‘볼랜드 개발툴 그룹’ 즉 Borland Developer Tools Group의 약자입니다. ‘CodeGear’로 이름이 정해지기 전에 국내 지사가 만들어져서 국내 지사의 법인명이 본사의 이름과 같게 BDTG Korea로 지어졌었습니다.

      그러니까 BDTG가 코드기어인데, 본사에서 BDTG가 CodeGear로 이름을 변경할 때 한국 지사인 BDTG Korea가 CodeGear Korea로 법인명 변경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국내 지사가 소규모이다보니 다른 업무들에 치여 법인명 변경 시기를 놓쳤습니다.

      본사 홈페이지에 BDTG Korea로 되어 있는 것은 아직 미처 변경을 못해서인데.. 데브기어로 곧 바뀔 겁니다. 뭐 어차피 같은 대표에 연락처도 같으니까 조금 늦어져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개발자분들께 혼란이 올 수 있으니까 빨리 바꿔야겠네요.

      DevGear라는 작명은, 생각하신 대로 Developer + CodeGear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원래 CodeGear가 쓰려고 했던 이름이 DevGear였는데 미국내에 DevGear라는 회사가 기존에 있어서 좌절된 바 있습니다. 법인명 작명에 있어 저희 내부에서 여러 안들이 나와서 며칠 동안 불뿜는(?) 토론을 했었는데, DevGear로 의견이 모아진 거죠. (사실 제 개인적으로 강력하게 밀었던 이름입니다^^)

      Devpia는 저희 리셀러(!)이기도 합니다. ^^ 데브피아에서도 저희 회사를 통해 Delphi를 공급하거든요. Dev는 개발자들에게 가장 흔한 접두사들 중 하나이니.. 뭐 데브피아 외에도 너무나 흔하죠.

  1. 데브기어는 좀더 긴 호흡을 했으면 합니다.
    과거…
    가고자 했던 방향에 대한 호흡을 잃어버린 현실에 대해서…
    기억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가는것…

    그리고…
    어찌 본다면…
    중요한 플랫폼의 변화와 ‘개발자’의 역활…
    ‘개발툴’의 역활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방향이 맞다면…
    같이 호흡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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